김소연이 살아온 길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가능하다

 

1. 쌀 조리하는 법을 배우던 아이

그는 1970년 한겨울에 태어났다. 방 가운데 파이프 지나가는 곳만 따뜻하고 나머지는 냉골인 방 한 칸짜리 가난한 집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파이프 지나가는 선에 그를 뉘어 놓고 혹시 아이가 잘못될까 노심초사하며 키웠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의 어머니를 ‘골방 새댁’이라고 불렀다.

가난한 부모님들은 그와 동생 넷을 데리고 답십리에 있는 할머니 집에 들어가 살기도 했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에야 할머니 집에서 분가를 해서 상계동 달동네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큰방 하나에 다락, 그리고 좁은 마루가 있었다. 여름에는 다락에서 자기도 했지만 겨울은 영락없이 방에서 일곱 식구가 가로 세로로 얽혀 잠을 자야 했다. 집안에 수도도 없어서 공동 수돗가에 가서 빨래를 해야 했고, 약수터에 가서 물을 길어 와야 했다. 어린 그는 물지게를 지고 산에 가서 물을 길어 오는 것이 신났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에 그의 어머니는 “집이 어려워 회사에 나가야 한다. 그래서 아침마다 네 긴 머리를 빗겨줄 수 없으니 머리를 자르자”고 했다. 인생의 첫 삭발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그에게 쌀 조리질하는 법도 알려주었다. 학교 갔다 오면 어린 동생들을 위해 밥을 해야 했다.

괴로워 술을 벗삼던 아버지의 신세 한탄과 불화로 집안이 자주 시끄러웠다. 그러면 그는 동생들을 안고 밤새 가슴 쿵쾅거리며 잠을 자지 이루지 못했다. 차라리 고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술 공장에 불이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고 한다.

가장 행복했던 때는 중학교 2학년 때 도서반에 들어가서다. 넓고 단정한 도서실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그제야 평온해졌다. 난로를 때고 종일 있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2. 1987년 사립학교 민주화투쟁

“엄마, 나 인문계 가면 안 될까?”

그는 고입 시험을 앞두고 인문계에 가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어머니에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래도 혹시 하는 생각에 지나가는 말로 “엄마 나 인문계 가면 안 될까?” 했더니 바로 “우리 집 형편에 무슨……”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눈물이 흐르는데 어머니가 볼까봐 얼른 훔쳐내고는 “그냥 해본 소리야”라고 말하고 마음을 접었다. 그렇게 간 곳이 고려대 근처의 정화여상이었다.

학교를 갔지만 아무 의욕이 없었다. 학교 건물도 희멀건 게 흉흉해 보이고, 정이 가지 않았다. 부기 1급 자격증이 있으면 특별전형으로 대학에 갈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밤늦은 시간까지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1987년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자연스레 학내민주화투쟁에 함께 하게 되었다. 누가 먼저 읽기 시작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에게』란 책을 돌려 읽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와, 우리 학교하고 어쩜 이리 똑 같냐.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즈음 여기저기서 “학교에서 수학 여행비를 떼어 먹었네”, ”동창회비를 떼어 먹었네“, ”장학금으로 사용하라고 준 것도 떼어 먹었네” 별별 이야기가 다 떠돌아 다녔다. 그 소문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1987년 11월 4일 아침, 학교 건물에 대자보가 좍 붙었다. 거기에는 그동안의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리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방송으로 변명을 늘어놓는 교감선생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자보를 붙인 선생님 중 한분이 반박하려고 한마디 하자 마이크를 꺼버렸다. 순간 우리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두 벌떡 일어나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운동장에 나와 보니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1, 2, 3학년 전교생이 모였고 교가를 다 같이 목놓아 부르며 꿈에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투쟁을 시작한 것이다. 농성이 시작되고, 졸업생들도 6백명 넘게 학교에 찾아와서 그들에게 힘을 주었고 이들로 인해 소문으로 들었던 학교 비리가 추가로 밝혀지기도 했다.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1,000명이 넘는 전교생이 서대문 서울시 교육위원회에서부터 제기동 정화여상까지 가두행진을 하기도 했고, 전교생이 ‘백지동맹’을 해서 시험을 전면 거부하기도 했다. 기사를 잘못 내보낸 『동아일보』사에 항의 전화를 하기로 한 후 학교 주변 공중전화부스엔 학생들이 몇 미터씩 줄을 서있기도 했다. 결국 신문사 측은 정정 보도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그는 그해 겨울을 교육청에 ‘관선이사 파견’을 외치며 학교에서 보냈다. 인생의 첫 농성이었다. 선생님 한 분과 학부모 한 분이 구속되었다. 하지만 관선이사는 파견되지 않았고, 교장선생님만 세 번 바뀌고 비리를 저지른 재단은 바뀌지 않았다.

한겨울 농성을 마무리하고 간선으로 뽑힌 학생회는 투쟁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함께 참여했던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정화여상 정상화대책위원회’를 꾸려 싸움을 책임져 나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직선제 학생회도 건설했다. 농성 과정에서 선생님들이 학교로 나오지 못하고 제3의 장소로 출근을 하면서 학교는 그들이 것이 되었다. 취업 요청이 들어오는 것도 학생들이 받아서 배분을 했다. 그가 함께 만들어 본 첫 번째 꼬뮌이었다.

당시 학교엔 주간과 야간이 함께 있었는데 야간엔 주로 형편이 더 어려운 이들이 다녀 평상시 차별의식이 깊었다. 예전 같으면 당연히 주간 1부 학생을 먼저 추천하고, 아주 드물게 야간 2부 학생을 추천하는데 학생들 스스로 그것은 차별이라며 생각해 똑같이 배분하여 추천을 하였다. ‘정화여상 사학 민주화투쟁’은 이후 그의 삶을 바꿔 놓았다.

3. 구로공단, 노동자의 길

학교 졸업 후 어느 정신병원에 입사했다. 원무과에 배치되어 직원들의 후생복지, 임금 계산 그리고 환자들의 병실 배치 업무를 하였다. 많은 환자들이 ‘행려환자’라는 이름으로 길거리를 헤매다 경찰과 함께 왔다. 이런 환자들의 상당수가 40~50대 여성이었다. 그 환자들을 볼 때 마다 마음이 많이 아팠다. 조금이라도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그들의 가족 찾기에 열과 성을 다했다.

하지만 3개월 만에 병원을 그만 두었는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게 싫었다. 사무실 청소를 해야 했고, 가끔 커피도 타야 했다. 한술 더 떠 원장 부인의 모임까지 챙겨야 했다. 그러던 중 원무과 부장이 담배 심부름까지 시켰다. 한바탕 싸우고 난 후 ‘내가 이곳에서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는 병원을 그만두고 자신이 주체가 되어 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섰다.

새로 찾아간 곳은 『우리교육』이라는 잡지사였다. 1989년 전교조가 만들어지고 정권의 탄압으로 해직된 1,500명의 교사들이 제대로 된 교육지가 필요하다며 창립한 곳이었다. 선생님들에게 필요한 자료들과 아이들에게 참교육을 실현할 수 있는지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실었다. 그는 이곳에서 독자사업부를 맡아 3년 넘게 일을 했다. 창립멤버로 시작한 일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일을 만들어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독자를 관리하고 매월 잡지를 발송하는 일은 밤을 새면서 하는 힘든 일이었지만 뿌듯했다. 일하는 과정에 서울지역출판노동조합에 가입하고 노동조합 활동도 함께 했다. 『우리교육』이 안정되어 갈 때쯤 다시 좀더 자신이 필요한 일을 찾아 떠났다.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까를 같이 고민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일할 수 있는 곳, 내가 주체가 되어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을 찾기로 했는데, 그곳이 바로 구로공단이었다.

4. 내 사랑 민주노조

1992년 4월 가리봉역에 내려 첫 면접을 본 곳은 갑을전자(1994년 갑일전자에서 이름이 바뀜)였다. 3교대를 해야 한다는 소리에 덜컥 겁이 났다. 밤을 새워 일하는 것은 상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간근무만 하는 회사에 입사했다가 6개월 만에 그만두고, 다시 갑을전자에 1992년 10월에 입사했다. 조금은 노동자 생활을 알 것만 같았다.

당시 갑을전자는 컴퓨터 헤드를 생산하는 공장이었는데 직원 수도 1,000여 명이나 됐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 셋이었다. 갑을전자는 1988년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져 파업투쟁을 통해 단체협약도 체결했지만, 위원장이 어용으로 돌아섰다. 어용 위원장이 임단협 합의서에 도장을 찍고 사라졌다가 오면 차가 바뀌었고, 위원장 옆에는 늘 두 명의 험상궂은 보디가드가 따라 다녔다.

자연스레 ‘노동조합민주화추진위원회’(노민추)에 함께 하게 되었다. 산하에 산악회, 노래패, 기타반, 여행반, 풍물패 등과 같은 각종 서클이 있었고,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노동조합은 어용이었지만, 부서마다 노민추 활동을 하는 친구들이 신뢰를 받으며 대의원을 하고 있었다. 몇 번의 현장파업 등으로 조직력이 꽤 되었지만 여러 번의 선거에서 민주노조를 만들려는 노력은 실패하고 말았다. 회사에서 선거 시기만 되면 노동조합 가입 범위에 있는 대리급까지 모두 가입을 시키고, 돈을 풀어 회식을 하도록 했다.

1994년, 선거 당시 부정선거로 어용집행부가 다시 당선되고나자 현장에 대한 전망 부재를 이유로 많은 노민추 회원들이 퇴사하고 다른 곳에 취업을 하거나 학교에 복학하는 등 새로운 자기 전망을 찾아 떠나기 시작했다. 1990년 초반 소련과 동구권의 현실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참 많은 이들이 떠나갔다. 그러나 그는 지금-여기에 있는 모순들과 아픔들을 뒤로 할 수 없었다. 다수를 이루던 실습생, 병역특례자들도 기간이 만료되면서 새로운 자기 전망을 찾아 회사를 떠나면서 노민추는 거의 해체되다시피 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몇 차례의 부서 이동을 당하기도 하는 등 탄압을 받았지만 굴하지 않았다.

1997년 다시 재건한 노민추 후보로 나서서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그가 내건 슬로건은 긴 어용의 세월동안 패배감에 젖은 조합원들을 이제 다시는 “배신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현장에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한 활동으로 눈코뜰 새가 없었다. 임단협을 전체 조합원의 찬반투표를 통해 합의했다. 1998년 3월 상급단체를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으로 전환하고, 당시 IMF구조조정의 위기를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려는 회사 측에 맞서 10년 만에 처음으로 파업에 나서기도 했다. 현장에는 스리랑카 여성노동자들도 40~50여 명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함께 흰색티셔츠를 입고 싸우던 감동의 순간들을 잊지 못한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말은 무슨 멋진 구호가 아니라 생활이었다. 1999년 임단협 시기에는 단위사업장 문제를 넘어 ‘주 40시간 쟁취’를 걸고 3박 4일 파업투쟁을 하며 전 조합원과 함께 거리로 나오기도 했다. 대공장노조들도 힘들어한 연대파업을 전개하며 모두가 뿌듯해 했다. 당시 무척이나 거세게 탄압을 받기도 했는데 당시 조합원 전순자씨는 경찰에게 “아저씨 전 진술서가 아니라 전순자인데요?” 해서 경찰서 안에 있던 사람들을 웃기기도 했다. 그렇게 진술서가 뭔지도 모르던 노동자들이었다.

1999년 무분별한 사업 진행으로 위기에 빠진 회사가 휴업을 요청해 오더니 급기야 2000년 6월 아무런 대책없이 폐업 신청을 해버렸다. 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갑을그룹 본사 점거와 모회사인 대구의 갑을방적까지 원정투쟁 등 155일간의 투쟁이었다. ‘회사 매각 시 고용승계, 노조승계, 단협 승계’, ‘퇴직금 전액보장’, ‘새로 취업할 때까지의 생계 대책비 보장(평균임금 9개월분)’이었다. 교섭 중에 몰래 그룹 본사를 빠져 나가던 사장을 사수를 서는 조합원들이 광화문에서 종각역까지 뛰어가 잡아 오기도 했다. 농성기간 내내 1시간 투쟁에 30분 휴식, 매일 조별 토론 등 프로그램을 지켰다. 단결과 투쟁의 힘은 일상 활동으로부터 나왔다. 조별로 노가바를 만들어 함께 부르고, 율동을 배워서 발표하고 조합원들이 돌아가며 발언하는 프로그램이 대부분이었다. 싸우는 중에도 상경 투쟁하는 대오가 있으면 무조건 쫒아가서 연대했다. 민주노조는 연대성이 받침되지 않으면 곧잘 기업별 울타리 등 수많은 지배이데올로기에 포위되어버리곤 했다. 한번은 보람원이라는 청소년수련원 노동자들이 상경해서 코오롱자본과 싸우는데, “너무 점잖게 싸운다. 그렇게 해가지고는 문제 해결 못한다”며 갑을 조합원들이 자발적으로 밥그릇 들고 코오롱 매장에 가서 몇 바퀴를 돌며 매장을 발칵 뒤집어놓기도 했다. 진술서가 뭔지도 모르던 조합원들이 “투쟁은 이렇게 하는 거”라며 젊은 보람원 동지들을 가르쳤다. 며칠 안 돼서 보람원은 타결되었다. 시간이 가도 회사 측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저녁 먹고 산책한다고 나간 조합원들이 삼삼오오 청와대로 향하기도 했다. 이렇게 공식적인 투쟁 일정 외에도 그들 스스로 다양한 방법으로 일상적 투쟁을 만들어 나가는 조합원들을 통해 그는 사람들의 자주성과 민주노조의 힘을 배웠다. 귀가 솔깃한 회사의 안을 7시간의 토론 끝에 부결시킨 것도 조합원들이었다. 그는 지금도 이 모든 감동의 순간들을 잊지 못한다. 일제와 군사정권에 부역했던 서정주 시인은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고 했지만, 그를 키운 대부분은 현장의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연대투쟁이었다.

2000년 10월, 아셈 반대투쟁을 강남 뱅뱅사거리에서 전경들과 맞붙어 치열하게 하고 있는데 사장으로부터 “급히 만나자”고 전화가 왔다. “갑을전자 명의로 회사 매각 시 고용승계, 단협 승계, 노조 승계, 생계대책비와 파산 시 퇴직금 법정소송을 위한 변호사비, 1인 1년간 상근비, 파업농성 기간의 임금 2개월분 지급, 갑을그룹 명의로 합의서 완전 이행까지 농성장 및 농성대오 식사 보장.” 100%에 가까운 승리였다.

합의서를 쓰고 나서 투쟁을 시작할 때 약속했던 전 조합원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숙소 앞에서 서로 어깨를 부둥켜안고 ‘늙은 노동자의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5. 국가보안법 없는 세상

그는 사측이 합의서를 성실히 이행하기까지 상근을 하기로 되어 있어서, 잠깐 금속연맹 서울본부 부본부장을 맡아 본부 상근을 하였다. 흔히 얘기하는 상층 활동은 이때가 전부다. 2001년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투쟁 때는 갑을조합원들과 함께 연대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부본부장으로 신규사업장 교육, 상담, 투쟁전술 등을 함께 짜기도 하면서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과 투쟁을 함께하는 기쁨도 느꼈던 시절이다. 더 많은 도움을 동지들에게 주지 못해 자신이 답답하게 느껴져 ‘더 많이 고민하고 공부해야겠구나’ 스스로 자각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던 어느 날 새벽, 아침 선전전을 하기 위해 일찍 집에서 나오다가 경찰들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연행되어 홍제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흉악한 인신매매범이 아니어서 다행이었고, 끌려간 분실에 욕조를 떼어낸 흔적이 있어 물고문은 안 당하겠구나 싶어 다행이었다. 그만큼도 모두 먼저 가신 민주 열사들과 동지들의 희생 탓이라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금 있으니 지역 동지들이 항의하는 목소리가 복도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 소리를 들으니 마음 한편이 또 놓였다. 그들은 거의 이틀을 잠재우지 않고 조사했다. 조사의 주요 내용은 민주노총 서울본부 부본부장으로서의 그의 역할에 관한 것이었다. 주로 누구를 만나 어떤 활동을 했는지, 대우자동차 투쟁 때 폭력시위를 주도했는지 등이었다. 함께 연행당해 온 동지들과의 통화기록을 가져와서 마치 대우자동차 투쟁 때 폭력시위를 주도한 것처럼 몰아가고 있었다. 연행되어온 사람들 다수가 노동조합의 간부였다. 그들은 노조간부들이 이적단체에 가입하여 불온한 사상을 가지고 민주노총이 불법시위를 하도록 유도하고 있고, 그 결과 이것이 확산되고 있다는 그림을 그리고 우리를 연행했던 것이다. 그들이 이런 무리한 수사를 한 것은 국민의 정부 들어서서 건수가 별로 없어 어떻게든 건수를 만들어 고용을 유지하려고 했다는 후문이 있었다.

당시 이적단체라고 지목당한 ‘서울민주노동자회’는 당시 자본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만연했던 도산 폐업 해외공장이전 등으로 회사가 없어지더라도 노조 간부, 조합원들이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공개 단체였다. 당당히 싸웠지만 결국 기소되어 구속되었고, 3개월 만에 집행유예로 출소하였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 그리고 가지지 못한 자들의 자유로운 단결과 연대를 막고, 제국주의에 맞서 평화롭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로 가고자 하는 통일을 막아선 국가보안법은 철폐되어야 한다는 평소의 신념을 확인하는 가시밭길이었다.

6. 나는 돌아가야 한다.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 상층 간부 활동을 접었다. 전태일 열사의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라는 말을 되새기며 새로운 현장을 찾아 떠났다.

민주노조가 없고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현장을 찾아 다시 구로공단을 헤맸다. 매일 생활정보지를 뒤지다 눈에 들어온 곳이 ‘휴먼닷컴’이었다. 휴먼닷컴은 비정규직들의 피눈물을 먹고사는 현대판 노예회사, 인력 파견업체였다. 바로 다음 날 휴먼닷컴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생 몇 명과 함께 차에 실려 기륭전자로 보내졌다.

공장에서는 아무도 말을 걸지도 않고,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면 무엇에 홀린 것처럼 사람들이 모두 한꺼번에 후다닥 뛰어갔다. 먼저 가 있는 사무직, 관리직 직원들 뒤에 서서 단 몇 분이라도 빨리 밥을 먹고 쉬고 싶어서였다. 콘베어벨트에 앉아 꼬박 10시간을 일을 하니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힘들었다. 그렇게 해서 현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파견직노동자들이 받는 돈이 2007년 기준으로 법정최저임금보다 10원 많은 641,850원이었다. 정규직은 상여금이 600%, 파견직은 0%였다. 구로공단의 90% 이상의 노동자들이 그런 비정규직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정규직, 계약직, 파견직, 알바, 고3실습생 등 다양한 고용 형태로 일을 하는데 같은 라인에 앉아 똑같이 일하는데도 고용 형태에 따라 월급도 다르고 처우도 다르고 인격도 달라졌다. 회사는 수시로 해고를 일삼았다. 일감이 약간만 줄어도 알바생, 실습생, 파견직 노동자를 우선적으로 해고했다. 수시로 해고자 명단과 계약직 전환 명단을 내는 조, 반장이 하늘이었다. 잘못된 업무 지시에도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두려운 사람들에 의해 쉬는 시간이면 간식거리가 조, 반장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이고, 명절이면 선물이 넘쳐났다. 혹시 일 못한다고 해고될까 두려워 쉬는 시간에도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한 여성노동자가 퇴사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출산휴가를 쓰고 난 후엔 미혼인 경우 6개월 계약, 갓 결혼한 신혼인 경우 3개월 계약으로 바뀌었다.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없는 경우에야 겨우 1년 계약직이 될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조회시간에 회사는 “실업자가 정문 앞에 줄서 있다”, “영원한 정규직도 영원한 계약직도 없다”며 말 잘 들으라고 소리쳤다.

그는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부친상을 당한 계약직 아주머니에게 “5천 원이라도 걷어서 문상을 가자”는 게 첫 일이었다. 차츰 소규모의 잔업 거부를 하고 회식을 가거나, 신입생 환영식을 하는 등 정규직, 계약직, 파견직을 넘어 현장 내에서 서로 나누고 연대하는 문화를 만들어나갔다. 과정에 미심쩍어하는 사측으로부터 몇 번이나 부서 이동을 당했지만 그는 가는 곳마다 민주노조의 씨앗들을 도리어 나누어 가졌다.

7. 일터의 광우병, 비정규직 철폐하라

이렇게 마음을 나눈 30명이 모여 두달 간의 준비 끝에 2005년 7월 5일, 정규직과 계약직, 파견직 등이 모두 함께 하는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당일 오전 10시, 그는 태어나서 그렇게 긴장되고 떨린 적이 없었다. 10시 쉬는 시간 종소리가 들렸는데도 너무도 조용했다. 실패인가 하는데 갑자기 우당탕 쿵 탕~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200여 명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와~!” 환호성을 질렀고 나눠준 노동조합 가입원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어떤 분은 “빨리 조합가입원서를 점심시간에 회사 밖으로 내 보내세요. 혹시 회사에 빼앗길지 모르니까!”라고 걱정했다. 헌법에 버젓이 노동 3권이 보장되어 있지만 그것이 현실과 얼마나 다른지, 현장의 힘으로 민주노조를 하나 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지렁이 노동자 한명 한명이 역사와 사회의 권리의 주체로 서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혁명적인 일인지를 다시 배웠다.

노조가 세워지고 나자마자 회사는 그를 따로 부르기도 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조장이 되어 모범라인을 이끌고 있던 그를 당연히 사측 편으로 생각하고 현장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노동자민중의 변혁운동은 애초부터 어설픈 자기 과시나 영웅주의와는 관련이 없었다.

파견직 노동자들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던 사측이 부서별 간담회다 뭐다 하면서 음료수를 돌리고, 아이스크림을 사왔다. 그렇게도 애원했던 여자 탈의실의 선풍기 문제가 단번에 대형 에어컨으로 해결됐다.

하지만 사측은 곧 현장 곳곳에 감시카메라 수십 대를 설치하고, 노동조합의 활동과 조합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용역깡패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계약직과 파견직 노동자들에 대하여 ‘계약해지’라는 이름으로 해고장을 날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인건비가 안 맞아 중국으로 생산라인을 모두 이전하겠다고 했다. 매출 1700억에 당기순이익 200억을 내는 알짜 회사였다. 노동부에서는 뒤늦게 상시적인 생산라인에 파견노동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 법을 사측이 어겼다고 불법파견 판정을 냈지만, 몇 년 동안 수백명의 파견노동자들을 불법고용해 임금을 착취한 벌은 고작 500만원 벌금이 전부였다.

2005년 8월 24일 전 조합원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요구는 ‘해고중단, 대표이사 성실교섭, 정규직화’ 크게 세 가지였다. “회사가 일단 해고 중단을 약속하면 업무에 복귀하고 교섭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사측은 묵묵부답이었고, 그런 사측을 경찰이 도왔다. 시간이 흐르고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생산라인에서 파업을 하는 것은 안 되지’라고 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곧 공권력 투입이 예상되었다. 수배된 사람들만 남기고 모든 조합원들을 내보냈다. 쿠테타군에 둘러쌓인 대통령궁에서 몇 명의 동지를 제외한 수비대 병사들을 다 내보내고 결사항전을 하다 끝내 총에 맞아 죽어갔던 칠레의 아옌데가 생각났다. 그보다는 휠씬 행복하지 않는가. 10월 17일 공권력이 투입되어 강제 연행당해 다시 3개월여를 살고 집행유예로 나와야 했다.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쌍 집행유예였다. 하지만 그는 투쟁과 연대를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기륭전자비정규직 투쟁이 곰과 호랑이도 쑥과 마늘로만 버티며 정성을 다하면 사람이 된다는 100일 건국신화를 넘어, 천일야화를 넘어, 1895일 동안 지속되었다.

매일 아침 7시 20분이면 어김없이 출근투쟁을 했고, 주1회 집회를 사수했다. 모든 연대투쟁에 함께 했다. 전국에서 투쟁하는 동지들과 함께 비가 내리는 날 일민미술관 옥상에 올라 총리 면담을 요구하며 농성을 하기도 했다. 레이크사이드CC 연대투쟁 당시 오리온전기의 한 동지는 실명이 될 정도로 눈을 다쳤고, 한 동지는 손가락이 절단되기도 했다. 그런 현장에 서야 하는 때가 도리어 일상이기도 했다. 모든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민중에게 전가하는 피눈물이 나는 시간들. 곳곳이 투쟁이었고, 설움이었고, 아픔이었다.

그 시간동안 죽는 것 빼고는 다 해봤다. 잊지못할 1000일 결사투쟁, 집단 단식에 함께 하다 경찰서에 끌려가서야 임신사실을 알게 된 강화숙, 비정규직 철폐연대가를 부르며 철탑을 오르던 은미, 살아서 투쟁해야 한다고, 매달아놓은 목줄을 끊어버리고, 위험한 물건을 내놓으라며 눈물을 흘리시던 고 이소선 어머니, 늘 가장 앞장서 달려와 꿋꿋이 맨 앞자리 지켜주셨던 백기완 선생님, 일본에서 돌아오시던 길로 농성장으로 달려와주셨던 문정현 신부님. 두 번의 국회점거에 함께 해주었던 정진우 목사님, 효진 스님, 김정대 신부님 등 종교인들, 농성장을 아름답게 꾸며주던 전미영, 이윤엽, 나규환, 전진경 등 문화예술인들, 시민들의 자발적 연대모임이었던 함께맞는비 동지들 등 다 거론하기도 힘든 수많은 벗들이 기륭투쟁에 함께 해주었다. 그 힘으로 3번의 고공농성과 두 차례의 국회의사당 점거, 그리고 2008년 94일 단식 때에는 실제 생사의 기로를 몇 번이나 지나야 하기도 했다. 기륭전자 투쟁에 헌신적으로 연대왔던 안티MB까페 운영자 윤활유는 공권력 폭력으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기도 했다. 2011년 2차 포크레인 점거농성 과정에서는 다시 송경동 시인과 함께 목숨을 걸고 공권력 투입에 맞서 싸워야 했다. 당시 1차 포크레인 점거농성 때는 현재 단식중인 쌍용차노조 지부장 김정우 동지와 정비지회장인 문기주 동지가 함께 올라가기도 했었다. 우리 모두가 하나였고, 한 목숨이었다.

그는 어떤 개악안도 받을 수 없었다. 딱 한번 사람이 되고자 했지만 최저임금에도 목메여 떠나간 조합원들을 생각하면, 당시 함께 싸우고 있던 이랜드-뉴코아, KTX여승무원, 코스콤 비정규직 동지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900만에 이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그 긴 세월동안 헌신적으로 연대해준 동지들과 사람들을 생각하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도 쉬지않고 죽어나가던 열사들을 생각하면 결코 질 수 없었다. 2011년 11월 1일 단식과 포크레인 점거농성 끝에 마침내 승리했다.

8.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그는 2008년 1000일 결사투쟁 이후 함께 한 동지들과 함께 한 축으로는 금속비정규투쟁본부 강화와 함께 기륭을 넘어서 비정규직 전체의 문제를 두고 싸우는 사회적 공대위를 만드는데 헌신하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작년 희망버스 운동을 주도했던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였다. 그와 동지들은 2009년엔 일터의 해고와 삶터의 해고는 다르지 않다는 생각으로 용산철거민 학살투쟁과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에 전념했다. 1년만에 용산학살로 돌아가신 다섯 열사들의 눈물의 장례식을 치룰 때 사람들은 그렇게 자본과 권력에 맞서 헌신적으로 싸워 온 그를 사회자로 호명했다. 2010년엔 동지들과 함께 파견제 폐지를 위한 사회적 활동에 집중했고, 2011년엔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사회헌장 제정 운동과 함께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희망의 버스’ 운동에 함께 했다.

2012년 20여개 투쟁사업장들과 함께 진행한 연대투쟁, <희망발걸음>, <희망텐트>를 추진했고, 얼마 전까지 ‘비정규직 없는 일터와 사회를 위한 10만 촛불행동’ 집행위원으로 10.27 희망행진을 만들었다. 지난 4월 스물두번째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희생자가 나오고, 이제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고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차릴 때 앞장서 경찰과 싸우다 다시 병원으로 실려 가기도 했다. 그후 쌍용자동차 투쟁에 늘 함께 해왔다. 2008년 당시 함께 67일 동안 단식을 했던 유흥희 조합원은 얼마전까지 2012년 생명평화대행진 진행단장을 맡아 함께 하기도 했다. 그와 그의 동지들은 지금도 자본주의의 폐악에 맞서 노동자민중들이 싸우는 모든 곳에 연대하고 있다.

* 본 글은 노동자 자기역사 쓰기의 일환으로 2011년 그린비에서 펴낸 『나, 여성노동자』 2권에 실렸던 김소연 후보의 글을 토대로 축약, 재정리한 것입니다. 책 내용과 다른 내용은 이번 과정에서 본인의 구술을 받았습니다. 좀 더 많은 생애사를 알고 싶으신 분들은 위 책을 찾아주시길 바래봅니다. 게재와 재구성을 허락해주신 그린비 출판사와 기획자들께 감사드립니다.